그의 불행은 몹시 단순하다. 사랑을 일찍 깨우친 일, 너무도 일찍이 깨우친 일. 계단을 밟을 때마다 나무가 몸을 비틀며 엄살을 피웠다. 오이카와는 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흰 여름 양말이 의붓 형제의 발을 곱게 감싸고 있었다. 소년의 발은 얇고 길쭉했으나 엄지발가락부터 새끼발가락까지의 윤곽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오이카와로 하여금 그...
오이카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소년은 끈 떨어진 인형 같았다. 제 쓸모 잃은 것을 알듯 팔다리는 늘어지고, 드러난 목덜미는 악의에 취약해 보였다. 그의 뭉툭한 손톱으로도 쉽게 상처 입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창고 안은 어두웠고 공이 든 상자와 성긴 그물, 매트리스 위에 두꺼운 먼지가 쌓여있었다. 소년만이 깨끗했고, 가장 손상되었다. 결국엔, 기어코 네가....
꾹꾹 눌러 쓴 글자는 똑바로 걸으려다 외려 비틀댄 듯한 모양새였다. 볼품없는 편지는 곧장 벽난로 행이라며 심통을 부렸더니 애 깨나 쓴 모양이었다. 글을 쓰는 데에도, 글씨를 쓰는 데에도 재주가 없는 편지의 발신인이 이목구비에 잔뜩 힘을 주고 편지지를 괴롭히는 모습이 어렵잖게 그려졌다. 음각 같은 활자에 햇살이 고여 있었다. 행을 따라 손가락을 옮기면 ‘다음...
그는 노을 지는 교실에 앉아있었다. 복도는 조용했고 가끔씩 운동장에서 공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웃음소리는 창틀을 넘지 못한다. 소음 속에서도 고요한 공간은 있다. 오이카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의자를 조심스레 뒤로 뺐다. 등받이에 매달린 가방이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책상에 뺨을 붙이면 풍경은 옆자리 소년의 잠든 모양으로 까맣게 잘렸다. ‘토비오....
허공에 먼지가 흩날렸다. 분진이 꾸역꾸역 시야를 채우고 오이카와는 그들이 사풍에 맞닥뜨렸던 날을 떠올린다. 전신을 천으로 에워쌌음에도 살갗이 따가웠다. 그는 동행의 목소리가 휘몰아치는 모래에 휩쓸릴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빨리 피할 곳을 찾아야 돼. 그때 그들은 손을 잡고 있었다. 한 발자국만 떨어져도 서로를 잃을 수 있단 말에 소년이 먼저 그의 손을 붙잡...
오늘 밤엔 누구도 죽지 않는다. 모든 종말은 잠시 지상을 떠났다. 탄생의 밤이었으므로 그들은 성가대의 소년처럼 목을 곧게 뻗고 정결한 생각만을 해야 한다. 화려한 리스 아래 촛불을 밝히고, 은총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치 훌륭한 만찬을 즐겨야만 한다. 모든 것이 온전한 25일의 밤, 남자는 밀어처럼 속삭였다. “이제 슬슬 죽여주지 않을래?” 그의 손톱이 소...
방문을 연 쿠니미는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숙면을 위해 큰맘 먹고 구매한 커다란 침대엔 장신의 동거인이 누워있었다. 이제 왔냐는 듯 눈썹을 밀어올리는 모습이 제 집사를 보는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쿠니미는 그로부터 먼 쪽으로 돌아 침대맡에 선다. 베개에 한쪽 뺨을 파묻은 채 그를 올려다보는 얼굴에 스탠드의 주황색 불빛이 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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